나의 많은 잘못 중에 공소시효가 완성된 범죄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토렌트를 이용한 저작물 불법 유통이다.
1. 도구
나는 ‘도구’를 좋아했다. 도구는 나의 능력을 넘어 새로운 힘과 자유를 선물해주었다.
그 시절 내가 특히 좋아했던 도구는 자전거, 락픽 (lock pick), 토렌트다.
자전거는 먼 곳에 가게 해주었고
락픽은 닫혀있는 곳에 가게 해주었고
토렌트는 상상의 세계에 가게 해주었다.
당시 나는 돈이 없었고,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도구를 통해 세상을 확장해나갔다.
토렌트를 통해 수많은 영화, 만화, 소설을 접할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지금도 도구를 좋아하지만 이제는 불법적인 사용은 지양한다.
2. 오프라인 사회에 기여
친구들에게 인정받는 일이 좋았다.
공부든 동아리든 도움을 요청할 때 기꺼이 나섰고,
닫혀있는 학교 세미나실 문을 따서 열어주고
요청받은 비싼 게임과 최신 드라마를 찾아주면
친구들이 고마움을 표했고 나는 그것에 만족했다.
수많은 비공개 트래커에 초대장을 구걸하면서도 가입한 이유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다.
“토쟁이/토렌트쟁이”나 “토덕/토렌트덕후”로 불리는 것이 좋았다.
그 호칭은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증거로 느껴졌다.
3. 온라인 사회에 기여
그렇다면 불법 다운로드만 열심히 하면 됐지, 왜 불법 업로드까지 했냐?
토렌트 트래커에는 (tracker, 토렌트 서버) “내가 받은 만큼 공유한다”는 이상이 깔려있다.
모든 사람이 이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오래된 자료도 유지되는 까닭에
“명문” 트래커의 이용자들은 다운받은 자료를 여러 해 동안 지우지 않고 지속적으로 “시딩”을 (seeding, 능동적이지 않은 P2P 배포) 한다.
나도 이 사회의 규칙에 공감하기 시작했고 단순 시딩을 넘어서 내가 직접 자료를 올리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토렌트 웹사이트와 연계된 채팅 채널이 (IRC) 있었다.
IRC에 모인 사람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같은 토렌트 트래커를 쓴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따뜻한 유대감이 있었다.
그들은 점잖고, 친절했고, 내가 뭔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받아들여줬다.학교에서와는 다른 종류의 유대감을 IRC에서 얻었다.
그 사회가 좋았고 일부가 되고 싶었다.
독특하게도 이 트래커에서는 여러 “릴그룹” (Release group, 자료를 최초로 트래커에 공개하는 팀)이 활동하고 있었고, 이 릴그룹들은 트래커 이용자들에게 감사와 인정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나도 릴그룹에 들어가 자료를 배포했고,
내가 올린 파일을 누군가 받아가는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결론. 나에게 남은 것
이 경험은 내게 여러 유산을 남겼다.
내가 속한 릴그룹은 주로 드라마와 영화를 다뤘다.
덕분에 영상 인코딩의 기술적 면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
새로운 인코딩 기술이 등장하면 내가 직접 조사하고 실험해서
우리 그룹에 유용한지 정리해 공유하기도 했다.
과학과 컴퓨터를 좋아하던 학생이었지만, 이런 ‘실전’ 기회는 흔치 않았다.
“예쁜” 영상이 나오도록 판단하는 안목도 키워졌다.
퀄리티 좋은 영상을 빠르게 출시하기 위해서는
영상의 미학과 컴퓨팅 자원의 밸런스를 지속적으로 맞추면서
아름다운 것이 뭔지 몰랐던 내게 심미안을 심어주는 경험이었다.
- 중학생 땐 인코딩된 영상 자료를 배포했고,
- 고등학생 땐 사진을 취미로 삼았으며,
- 대학생 땐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 대학원생 땐 컴퓨터 비전을 공부했으며,
- 지금은 회사에서 영상 기술과 카메라를 연구하는 내가 있다.
중학생 때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지금 하는 일과 그 시절 했던 일이 묘하게 닮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동시에, 그 모든 활동이 불법이었다는 점에선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활동 규모도 작았고,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처벌받지는 않겠지만,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 자신을 말리고 싶다.